장애인을 바라볼 때 흔히들 '순수하다', '착하다', '천사 같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심지어는 그런 모습에 '힐링이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겉으로 보기엔 따뜻한 찬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문장들 이면에는 매우 위험하고 차별적인 시선이 깔려 있다. 비장애인들이 무심코 던지는 이런 말들이 왜 장애인을 대상화하고 그들의 인간적 복잡성을 지우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최근 장애인식 개선을 위한 동요 개사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참여자가 가사에 '순수한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넣었다. 난 "장애인이 순수해? 과연?…“이라고 조심스레 질문하자, 그 참여자는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요! 순수한 장애인도 있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그 참여자 역시 장애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는 약간의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평소 스스로를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에 가깝다고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왜 우리가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지 역설적으로 실감했다. 비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조차도 '장애인=순수하다'는 고정관념을 내면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과 타인을 구분 짓거나 차별의 논리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장애인을 '순수하다'고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순수함이라는 박제된 이미지 속에 갇히게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욕구, 분노, 슬픔, 그리고 때로는 이기적이거나 냉소적인 모습조차도 장애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곤 한다.
'순수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낙인은 장애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사회적 부당함에 저항할 때,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순수하지 못한 것' 혹은 '변해버린 것'으로 폄하하는 근거로 악용되기도 한다. 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이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며, 갈등을 겪는 평범한 주체이다.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순수함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폭력이다.
더 큰 문제는 '장애인을 보면 힐링된다'는 비장애인 중심의 논리이다. 이는 장애인의 삶을 오로지 비장애인의 마음을 위로하거나 감동을 주기 위한 '도구'로 소비하는 행위이다.
장애인의 일상은 비장애인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존재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중이다. 나의 정서적 허기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삶을 감상적인 시선으로 소비하고, 그들을 '천사'라는 비현실적인 틀에 가두는 것은 상대방의 주체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이다. 누군가의 '순수함'을 증명하려 할수록, 정작 그 사람의 구체적인 삶은 지워지고 만다.
우리는 이제 '장애인이니까 순수할 것이다'라는 판타지를 버려야 한다. 그들을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반대로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 모두 장애인을 우리와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진정한 존중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이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때로는 예의 바르며 때로는 무례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복잡한 인간임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장애인이 힐링의 소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평등하게 토론하고 갈등하며 살아가는 동료 시민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시선이 장애인을 향한 '판타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짜 소통이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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