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몸이 나보다 먼저 깨어난다.
야한 생각도, 야한 꿈도 꾸지 안았는데 내 소중이는 어김없이 신호를 보낸다.
“ 이그~~ 야속한 녀석아. 주인 좀 생각해주면 안 되겠니.”
몸은 늘 이렇게 정직하다. 이유도, 상황도, 논리도 없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려는 듯 꿈틀거린다.
예전엔 그런 나를 부끄러워했다.
장애를 가진 몸이 욕망을 가진다는 게 죄스러웠다.
“너도 그런 생각해? 그런 건 생각도 하지마. 결혼? 연애? 누굴 힘들게 하려고… 국제 결혼? 미쳤구나.“
이런 거세의 말들이 내 안의 불씨를 꺼뜨렸다.
그러나 욕망은 불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서 연애를 하고 뜨거운 섹스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강렬했다.
누군가의 손끝, 입술, 체온. 그 따뜻한 감각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된다.
나는 늘 사랑을 꿈꾸지만, 이젠 결혼도, 동거도 바라지 않는다.
이 나이에 무슨…
그저 서로의 구속이 없는 관계,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그런 연애면 좋겠다.
삽입은 할 수 없다. 왜?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
그냥 물고, 빨고, 만지고, 서로의 욕구를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간적이다.
엄마 젖을 물고 잠든 아기처럼 자고싶다. 그리고 누군가 내 소중이를 잡고 조용히 잠들어줬으면 좋겠다.
그게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면 왜 죄여야 할까.
윤리와 종교는 늘 말한다.
욕망은 절제하라고, 너의 몸은 신의 성전이라고.
하지만 신이 나에게 이 몸을 주셨다면, 욕망 또한 신의 일부 아닐까.
내 안의 뜨거움을 죄로만 여긴다면, 그건 신이 내게 허락한 생의 충동을 억누르는 일일 것이다.
나는 믿는다. 욕망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몸이 내게 보내는 가장 솔직한 편지라고.
현실은 트위터(X)속 벌거벗은 여인들과의 상상속 섹스로 끝나지만,
그 상상이 나를 살게 한다.
프로필로 올린 누군가의 야한 사진을 보며
그 안에서 나는 그냥 인간이다.
누군가를 원하고, 누군가의 체온을 상상하고, 그리움으로 또 하루를 견딘다.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섹스, 그게 뭐 어때서.
그저 외로움의 다른 이름 아닐까.
사랑이 꼭 입맞춤이어야만 사랑일까. 삽입이 있어야만 섹스일까.
나에게는, 손끝의 온기가, 숨결의 떨림이, 충분히 사랑이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넌 그런 몸으로도 사랑을 느껴?”
나는 웃으며 말한다.
“그런 몸이라서 더 절실하지.”
사랑은 모양이 아니라 온도다.
나는 오늘도 오지 않는 그 누군가를 그 체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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